박완서 × 현저동
『나목』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의 작품을 남긴 박완서 소설가는 일제시대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6.25 전쟁을 겪는 동안에도 서울에 머물렀다.
서울에서 보낸 학창시절의 자취를 따라가기 위해서 무악동과 인왕산을 거쳐 매동초등학교까지 걸어봐야 한다. 어린 박완서를 따라가는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개성 근처 마을이었다. 경기도 개풍군으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북한에 있다보니 지금은 갈 방도가 없다. 박완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의 어머니는 주변 어르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 뜻에 따라 개풍에서 서울로 이사 와서 살게 된다. 그때 처음으로 살게 된 서울 터전이 현저동이다. 현저동(현재 무악동)은 지금도 경사가 상당히 높은 곳으로, 당시에는 생활 여건조차 굉장히 열악한 곳이었다.
박완서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였던 1931년 9월 15일 박완서는 황해북도 개경시 남쪽 개풍군에 있는 마을,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그해 5월 미국 뉴욕 맨해튼 34번가에는 안테나를 포함해 443미터, 지상 102층에 이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되었다. 향후 39년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 빌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박흥식이 현재 종로타워 위치에 있던 화신상회를 인수해 증개축하여 화신백화점으로 문을 열었다. 지상 5층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았다.
1931년에는 전두환, 보리스 옐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태어났고, 소파 방정환과 토마스 에디슨은 세상을 떠났다. 염상섭은 조선일보에 『삼대』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동아일보는 『신동아』를 창간했다.
그의 아버지는 3살 때 사망했다.
1930년대에는 맹장염이 도지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항생제가 없을 때였다.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된 것은 1944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수술 후 침입된 세균에 의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발발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 1천만명, 민간인 2천만명이 죽었는데,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상처가 생긴 후 세균 감염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때였고, 박완서의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형제 중 가장 체격이 좋고 잔병 한 번 치른 일 없는 건강체였다고 한다. 그런 분이 어느날 갑자기 복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할아버지는 당신의 약방문에 의한 생약 한약 등으로만 다스리고, 할머니는 무당 집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사이에 마침내 기지사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엄마는 단호히 아버지를 달구지로 송도(개경)까지 싣고 갈 수가 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맹장염은 복막염을 일으켜 배 속 가득 고름이 찬 것을 뒤늦게 수술을 했지만 항생제도 없을 때라 결국은 덧나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하 '싱아')
박완서 어머니, 홍기숙 여사
박완서의 어머니 홍기숙 여사는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의 조그만 셋방으로 이사와 자녀들이 서울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또한, 이야기꾼으로 그 자질을 작가에게 물려 주었다. 어머니는 박완서의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엄마의 말뚝, 싱아, 그 산에 이르기까지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어머니의 함자는 몸 기己 자, 잘 숙宿 자여서 어려서부터 끝 자가 맑을 숙淑 자가 아닌 걸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 (엄마의 말뚝)
남편 없이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개풍에 남게 된 박완서의 어머니는 서울로 이사를 결심한다. 박완서가 7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린 완서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개성역에서 경성역까지는 10개의 정거장. 서울에 처음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곳은 서대문구 현저동이었다.
서울역에서 현저동까지
어머니가 박완서를 데리고 개성에서 서울역까지 기차를 타고 왔다. 어머니는 서울역에서 지게꾼을 불러 독립문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지게꾼에게 처음부터 현저동에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독립문까지 가자고 한 다음에 지게꾼을 구슬려 현저동 집으로 향한다. 지게꾼과의 대화에서 당시 현저동이 어떤 곳인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독립문이란다.” 엄마가 말했다. 뒤따라오던 지게꾼이 거진 다 왔느냐고 숨찬 소리로 물었다. “조금만 더 갑시다.” 엄마의 얼굴에 느닷없이 비굴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아, 조금이 어디냐니까요?” “조오기, 현저동…” 엄마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더니 누굴 놀리냐고, 그 산꼭대기를 누가 그 돈 받고 가냐고 눈을 부라렸다. 엄마도 지지 않고, 평지면 전차를 타고 편안히 가지 뭣 하러 전차 값 몇 곱절이나 주고 품을 샀겠느냐고 따지고 나서, 막걸리 값은 더 생각하고 있으니 어서 가자고 달래기 시작했다. 지게꾼은 오늘 재수 옴 붙었다고 투덜대면서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엄마 입에서 현저동이라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 눈에 띄게 불손해졌다. 우리를 넘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대체 현저동이 어딘데 저러는 걸까. 나는 눈치로 감을 잡은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싱아, 박완서)
<엄마의 말뚝>에서는 이에 대한 묘사가 조금은 다르게 그려진다. 먼저 현저동에 가는 것으로 지게꾼과 협상을 하고 출발한다. 당시 독립문은 의주로 한복판에 있었다. 나중에 생긴 전차길이 독립문 양쪽으로 났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고가차도가 있기 전이었다. (정식명칭은 아니지만 독립문고가차도라고도 부르는) 현저고가차도는 1979년 8월 16일에 준공했고, 독립문은 고가차도 밑에 잠시 있다가 1980년 3월 31일 70미터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박완서가 서울에 처음 도착해 걸어가면서 본 독립문과 전차길의 풍경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독립문 양 옆으로 전차길이 2줄씩 나있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지게꾼과 같이 어린 완서가 7살 나이에 처음 보는 서울 현저동의 풍경이 그려진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 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널빤지로 된 일각대문은 있으나마나 하게 살림살이를 거리로 발랑 드러내고 있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까지 층층다리 양쪽 가장 자리의 파인 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 비비고 지날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 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 비켜선 층층대 위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 동네서도 초가집은 드물었다. 그 집이나마 우리 집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싱아, 박완서)
박완서의 현저동 생활
현저동은 사대문 밖이었다. 사대문 밖이라 하더라도 이미 행정구역 상 경성부였으나, 사람들은 관용적으로 문밖은 서울이라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래서 서울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항의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안에서 살아 보자꾸나.” (싱아)
박적골 대가족 사이에서 편안하게 살아오던 어린 완서는 힘겨운 서울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 날부터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다 뒷간이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 나온 다음에 가는 거라고 했다. 뒷간을 변소라고 한다는 것은 기차간에서 이미 배운 바가 있고, 한 사람씩밖에 못 들어가게 돼 있는 안집 변소도 어제 한 번 다녀오긴 했어도 똥 마려운 것까지 안집한테 양보해야 된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싱아)
서울 셋방살이의 경험은 박적골에서의 생활과 더욱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박적골집은 나의 낙원이었다. 뒤란은 작은 등산같이 생겼고 딸기 줄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 밖에도 앵두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때맞춰 꽃피고 열매를 맺었고 뒷동산엔 조상의 산소와 물 맑은 골짜기와 밤나무, 도토리나무가 무성했다. (엄마의 말뚝) 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 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 찔레 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 기쁘게 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싱아)
수도시설과 하수도 시설도 없었다. 마실 물은 직접 떠오거나 물장수가 지게로 떠와야 했고, 쓴 물은 그냥 버렸다. 똥은 똥지게꾼이 가지고 내려갔다.
현저동 일대에 물난리는 극심했다. 집집마다 수도라는 건 아예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물지게 질 만한 식구가 없는 집에선 물장수를 댔다. 미장이, 도배장이 다 능숙한 엄마도 물지게만은 못 졌다. 이렇게 사먹는 물이니 겨우 식수나 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비가 올 때마다 내 집으로 떨어진 빗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독독이, 그릇그릇 받아놓고, 빨래도 하고, 세숫물로도 쓰게 했다. 세숫물에 장구벌레가 가득들어 있어서 질겁을 하면 엄마는 체에다 받쳐서라도 그 물을 쓰게 했고 쓰고 나서도 한 방울도 버리진 못하게 했다. 세숫물로 다시 발을 씻고, 발 씻은 물로 걸레를 빨고, 걸레 빤 물은 괴불마당 구석에 있는 나의 꽃밭에 뿌리는 물의 완전이용 과정을 엄마는 아침마다 엄숙한 얼굴로 감시를 했다. (엄마의 말뚝)
매동초등학교
학교 선택에 있어서 어머니는 신중했다. 현저동에 살고 있다 보니 갈 수 있는 학교도 정해져 있었다. 원래는 무악재 너머에 있는 학교에 가야했다. 1937년에 개교한 홍제공립보통학교였을 것이다. 지금은 서울안산초등학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도성 밖에 있는 학교가 아니라 도성 안에 있는 학교를 보내고 싶어했다. 어머니가 보내기로 마음 먹은 곳은 매동초등학교였다. 현저동에서 인왕산을 넘어 걸어 갈 수 있는 학교였다.
엄마는 우리가 가난하니까 사는 건 문밖에서 살아도 할 수 없지만 학교는 문안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학구제처럼 사는 동네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져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엄마가 벌써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 집에 옮겨 놓은 뒤였다… 문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 거리를 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싱아)
지금으로 치면 위장전입을 했으니, 박완서의 어머니는 초조했다. 어린 딸에게 집 주소를 2개 외우라고 성화였다. 하나는 위장전입한 주소, 다른 하나는 살고 있는 주소. 그렇게 열심히 외우게 해 박완서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했다.
사직동 주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그 후에 거친 수많은 집의 주소를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현저동 46번지의 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는 여태껏 안 잊어버리고 있다.
현저동은 오늘날의 무악동
박완서가 살았던 때는 현저동이었으나 지금 그곳은 무악동이 되었다. 예전 현저동은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1975년에 <구의 증설 및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7816호) 제3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서대문구 현저동을 종로구에 편입하고 <서울특별시 동 명칭 및 구역 획정 조례>(조례 979호)에 의해 현저동의 의주로 북쪽 지역을 무악동으로 분리하여 신설하면서 고유한 법정동 및 행정동을 갖추게 되었다. 의주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잇는 길로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다. 1972년 명칭을 통일로로 변경하였다.
무악동 현재의 모습
서울 구역사에서 통일로를 따라 서대문역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현저고가차도가 나오고, 왼쪽으로 독립문과 공원이 보인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독립문역이 나오고, 독립문역 3-1 출입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무악현대아파트와 인왕산2차 아이파크로 가는 길이 보인다.
전차길은 넓은 차도로 바뀌고,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으로 탈바꿈했고, 주변은 공원이 조성되었다. 무악동은 재개발이 이루어져 허름한 주택들이 아파트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무악현대아파트와 인왕산아이파크2차 사이를 통과하는 (주민들은 88계단이라 부르는) 층층다리에는 아직도 현저동 때의 자취가 남아있다.
88계단을 힘겹게 오른 다음, 인왕산2차아이파크 후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걷다보면 다시 층층다리가 나오고, 계단을 다시 한번 힘겹게 올라가면 무악어린이집이 나온다. 이 높은 어린이집을 걸어 다니는 아이들은 다리 하나 만큼은 튼튼해질 것이다.
어린이집을 지나 다시 바위와 계단길을 따라 쌈지공원과 수도시설을 지나면 모래 놀이터가 나오고 이를 지나면 한양도성에 이른다. 바로 이 길이 작가가 어린시절 매동초등학교로 넘어가던 인왕산 자락이다. 여기에서 숲 길이나 찻길을 따라 황학정을 지나 매동초등학교까지 넘어가 볼 수 있다. 작가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뿌리며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잠시나마 우월감을 맛보았던 장소, 사직공원을 방문해도 좋다.
현저동 46-418의 위치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1958년 지번 지도와 1968년 지번 지도를 제공한다. 이를 살펴보자.
1968년까지만 하더라도 현저동의 주된 영역이 오늘날 무악동에 해당한다. 현재 현저동으로 남은 지역은 ‘똥골’이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똥지게를 지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박완서가 살았던 현저동 46번지 일대는 현저동에서도 가장 넓게 펼쳐져 있다. 독립문초등학교부터 무악현대아파트 103~108동에 이르는 지역, 인왕산현대아이파크2차 아파트까지 걸쳐 46번지가 있다. 그중에 조그만 한 필지가 418번지였을 것이다.
1958년 지도에서는 46-412번지의 위치가 보인다. 416번지가 직접적으로 적혀 있진 않지만, 416번지도 가까이 위치했을 것이다.
현재의 위성사진과 1958년 지번 지도를 겹쳐 본 결과, 현저동 46-412번지는 대략적으로 무악현대아파트 106동 위치에 있었다. 46-418번지도 그 주변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박완서가 살았던 현저동 주택이 무악현대아파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완서가 매동초등학교까지 걸어갔던 길도 확인할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와 굿당
인왕산을 좀 더 보기 위해서는 무악어린이집에서 차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사찰 입구를 만나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경사로와 층층다리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국사당이 나오고, 국사당을 지나 왼편으로 선바위가 있다. 작가가 유희를 찾아 굿을 보던 곳이었으나, 어머니는 서대문형무소와 더불어 끔찍하게 생각했던 곳이었다. 어머니는 기회만 되면 현저동을 떠나고 싶어했는데, 이는 동네가 사대문 바깥의 빈곤한 동네라 사람들의 면면이 변변치 않고, 서대문형무소와 굿당이 있는 까닭이었다.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간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보인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굿이 들었을 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 부스러기가 늘 널려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 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큰 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 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 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 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만한 것이 전무한 긴긴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매동초등학교까지 걸어가던 길
현저동에서 매동초등학교까지는 인왕산 산길을 걸어야했다. 당시에는 찻길도 나 있지 않았고, 조그만 산길만 있었다.
현저동에서 사직공원으로 넘어가는 등성이도 문제였다. 거긴 정작 인왕산보다 훨씬 수목이 우렁차고 사람의 왕래가 드물었다. 문둥이가 여기저기 굴을 파고 살고 있다고 소문나 있는 곳이었다. (엄마의 말뚝) 내가 넘어 다니는 인왕산 자락엔 쑥 하나 돋아나지 않았고, 바위가 부스러진 것처럼 메마른 흙에선 겨우 아카시아가 악착같이 자라고 있었다. 아카시아는 우리 시골에선 한 번도 못 보던 새로운 수종이어서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나무 그늘에선 아무것도 자라고 있지 않아 뻔한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산의 독특한 향기도 없었고 새의 지저귐도 없었다. (싱아)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싱아)
현저동 괴불마당 집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산 현저동 산꼭대기 ‘괴불 마당 집’은 지금의 무악동 경계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섯 칸짜리 누옥을 장만한 어머니는 감개무량해 이렇게 말한다.
금융조합에서 집값의 절반은 융자를 받았건만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집은 역시 현저동 꼭대기였다. 세들어 살던 집에서도 오르막길로 더 올라가 동네가 인왕산 마루턱을 치받으면서 끝나는 데 있는 여섯칸짜리 작은 집이었다. 그러나 어엿한 기와집이었다. (엄마의 말뚝) 이사 간 날, 첫날 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엄마의 말뚝) 가끔 문안과 문밖의 현격한 집값의 차이를 한탄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집을 사게 되는 날이 현저동을 면하는 날이거니 믿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현저동 꼭대기에 그 여섯 칸짜리 기와집을 천오백 원에 사서 반이 조금 넘는 팔백 원을 융자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집을 괴불 마당 집이라고 불렀다. 마당이 괴불처럼 세모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같이 그 집에 만족했고, 또한 사랑했다. (싱아)
박완서는 현저동 괴불마당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박적골에서의 유년시절에 이어 학창시절을 고스란히 현저동에서 보낸 것이다.
오빠가 성공하면 곧 문안으로 들어갈 것을 믿고 임시적으로 인왕산 마루턱에 박은 말뚝에 우리는 그 후에도 10년이나 매여 살았다. 오빠는 학교를 졸업하고 큰 회사에 취직도 하고 효성도 여전히 극진했으나 문안에다 번듯한 집을 살 만큼의 성공은 못 됐다. (엄마의 말뚝)
박완서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숙명여고에 진학한다. 숙명여고는 지금은 강남 도곡동에 있으나 1981년 이전하기 전에는 종로5길 68에 있었다. 지금은 코리안리 빌딩이 들어서있다. 단짝이었던 복순이는 경기여고(1988년 강남 개포동으로 이전하고, 해당부지는 헌법재판소로 사용되고 있다) 로 진학하며 헤어지게 된다.
여고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인왕산 자락을 넘어서 통학하는 일을 면하고 전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의 헐벗은 산에 정을 붙이지 못했지만 육년을 한결같이 걸어 다닌 산길이었다. 사월의 벚꽃, 오월의 아카시아, 겨울의 설경 등이 그립게 회상되고 서울 아이들이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혜택받은 통학 길이었다고 회상하게 되었다. (싱아)
몇 차례의 이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의 수탈도 더욱 가혹해지자 박완서는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갔다. 해방 후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은 서울집을 싸게 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적산 가옥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서 그로 인해 서울의 집값이 가장 쌀 때였다. 우리는 개성 집 판 돈에다 작은숙부가 보태 준 돈을 합해 당시에도 서울서 가장 집값이 비싸다는 광화문 근처 신문로에다 집을 샀다. 엄마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문안사람이 된 것이었다. 지대만 좋은 게 아니라 새로 지은 반들반들하고도 반듯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때로서는 드물게 목욕탕까지 있는 집이었다. (싱아)
신문로의 위치가 어디었는지는 상세히 나오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오래 살지 않아 위치가 어디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네 가족은 광화문을 떠나 돈암동으로 이사한다.
한번은 형사가 신문로 집에 그런 친구 중의 한 사람을 찾아온 사건을 기화로 엄마는 갑자기 그 집을 팔기로 결심을 했다. 오빠가 생활을 돌보지 않아 숙부의 도움으로 살림을 꾸릴 때라 집을 줄여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돈암동 전찻길가에 살림집이 딸린 큰 가게 터가 하나 나왔는데 숙부가 그걸 사고 싶어 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돈암동 집에서도 안정을 못 하고 육이오가 날 때까지 거의 일 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육이오 전까지 돈암동에서만 세 번 이사를 다녔는데 아마 삼선교 근처에 살 때가 오빠가 가장 깊숙이 좌익 운동에 투신했을 때가 아닌가 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싱아)
박완서 작가는 돈암동에 살던 때 어떤 일로 선생님 ‘박노갑’을 찾기 위해 현저동에 가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노갑 선생님이 현저동에 산다는 걸 알았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말할 수 없는 친애감을 느꼈다. 숙직 선생님도 현저동에 대해 뭘 좀 아는지 이런 약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약도를 보면서 벌써 대강 짐작이 갔다. 찾을 자신이 있었지만 종숙이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하고 그냥 가 보자고만 했다. 왠지 그 동네에 대해 아는 척하기가 싫었다. 수치감 같은 것하고는 달랐다…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고 밤이라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이 더 꼬여 보였다. 나는 종숙이한테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처럼 굴면서 혹시 그 애가 그 동네를 흉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나는 그 후 선생님과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성립된 것처럼 느꼈고 그건 현저동을 공유한 데서 오는 연대감이었다. (싱아)
6.25 시절의 현저동
작가가 현저동에 다시 머무르는 때가 온다. 6.25 피난 때, 특히 1.4 후퇴 때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저동에 머무르게 된다. 그때의 긴박하고 살 떨리는 경험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소설 속에 결정적일 만큼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가있다.
박완서는 전쟁 중 폐허가 된 서울을 바라보며 자신이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예감을 갖게 될 만큼, 현저동은 작가에게 각별한 장소가 된다.
무악동 그 후
무악동은 이후 여러 차례 개발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빌라들이 들어섰다. 독립문아파트(한 동 짜리 건물)가 들어섰고, 1970년대에는 인왕산1차아이파크와, 인왕산2차아이파크 지역에 걸쳐 대규모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아직 대규모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전 모습으로, 왼쪽 붉은색 벽돌 건물이 ‘독립문아파트’이다.
1970년대 인왕산 아래 현저동의 모습이다. 왼쪽에 보이는 산은 안산이다. 무악재(현 통일로)를 가운데 두고 안산과 인왕산 양쪽으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현저동은 공공용지를 점유하는 무허가 건물들로 가득했다. 70년대 들어 이 건물들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아파트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무악동 일대 현저 3 재개발지구의 철거 전 모습이다. 1973년 「불량주택 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공공용지를 점유하고 있던 무허가 건물들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아파트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정비가 가능한 지역은 재개발을 시행하였다. 현저 지역은 1974년 불량주택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이후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었다. (1979.05.20)”
무악동에 연립주택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연립주택은 나중에 다시 또 허물어지고, 아파트(인왕산아이파크 등)로 바뀌었다. 박완서는 이때 이곳을 지나다가 연립주택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의 소설에 들어가있다.
몇 달 전 친구들과 택시로 영천을 지난 적이 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나만의 은밀한 애정과 감회를 가지고 현저동을 쳐다보다가 그 동네의 변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괴불마당이 있던 근처에 연립주택이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괴불마당 집이 있던 근처에 연립주택이 병풍처럼 들어서서 인왕산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가리고 있었다. (엄마의 말뚝) 나는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나의 어린 시절의 통학로였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저동 꼭대기가 끝나고 등성이를 넘어가는 길로 접어들려고 하자 성벽이 가로막는 게 아닌가. 신축된 성벽은 인왕산으로부터 흘러내려와 서대문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옛 길이 있던 곳엔 성벽의 문이 나 있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상상을 하시던 문악 문밖의 구체적인 모습을 지금 와서 볼 줄이야. (엄마의 말뚝)
박완서의 죽음
2011년 1월 22일 담낭암으로 향년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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